사진의 돌발: 과거와 현재
사진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존재하는 까닭에 우리는 별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사진을 ‘마치’ 우리 눈 앞에 지속적으로 펼쳐지는 현실의 복사판인 것처럼 여긴다. 우리는 본인 사진이나 가족 사진, 기념물이나 신기한 것을 찍은 사진을 즉석에서 SNS에 올린다. 그러고는 이 사진이 우리가 눈으로 실제 보고 있거나 또는 본 것 과는 동일시할 수 없는 기술적 생산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내용 전체보기미셸 프리조, 큐레이터
사진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존재하는 까닭에 우리는 별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사진을 ‘마치’ 우리 눈앞에 지속해서 펼쳐지는 현실의 복사판처럼 여긴다. 우리는 본인 사진이나 가족사진, 기념물이나 신기한 것을 찍은 사진을 바로바로 SNS에 올린다. 그러고는 이 사진이 우리가 눈으로 보거나 보았던 것과는 동일시할 수 없는 기술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하지만 이미지를 보며 즉각 파악할 수 있는 단순하고 일시적인 정보가 맥락을 벗어나는 순간, 사진은 다시 작은 수수께끼가 된다. 사진은 투명함보다는 모호함이, 명료함보다는 잇따르는 의문이 본질을 규정한다.
사실 사진은 늘 돌발적이다. 비전문가의 사진이든 ‘오래된’ 사진이든 현대 사진작가의 작품이든, 사진은 카메라가 생산한 결과물을 바라보는 관객의 눈에는 언제나 새로운 발견이다. 우리가 지각하는 현실과 응당 아주 유사하다고 여기는 사진은 빛의 물리학이 (현대 디지털 시대에서는 소프트웨어와 함께) 만드는 이미지의 속성들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 사진은 더 광대한 현실의 파편일 뿐이고 체험한 시간대의 극히 작은 순간이므로, 연속적인 사건을 대표한다고 볼 수 없다. 사진은 한 사람(사진가)의 개인적이고 임의적인 ‘시각’이며, 이 시각은 다양한 지식과 문화적 기준으로 채워진 여러 관객의 시선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보는 이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이 시각을 해석해야 한다.
‘예기치 않은’ ‘모호한’ ‘불가사의한’ 같은 말들은 관객,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계속 이어지는 관객들이 사진의 의미를 생각하며 떠올리는 수식어들이다. 실제로 사진은 보이고, 보고, 보관하고, 유포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달리 말하자면, 이틀이든 50년이든,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많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차후에 보는 자가 사진 해석의 주도자이자 심판관이 된다. 사진 이미지 앞에 선 우리는 이미지를 ‘이해’하고자 한다. 이 사진이 우리에게 건네진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고, 촬영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염두의 대상자이고 관여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사진의 돌발. 과거와 현재’ 전은 사진에서 촉발되는 ‘돌발적인 것’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탐색하고자 한다. 얼핏 보면 이해되는 이미지가 어떻게 불가사의한 부분을 간직한 채 해석되기를 거부하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던, 대부분 익명의 사진가나 비전문가가 찍은 오래된 사진들(1850~1950년), 보도 사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진작가의 작품 등을 분석한다. 이러한 작품들을 선정한 것은 예술이나 미학에 대한 욕망이 드러나지 않고, 유명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별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시장에는 우리가 살펴보고 싶은 사진의 자연스러움이 드러나고, 전적으로 ‘사진’의 특성들이 충만하게 전개된다. 바로 이런 유형의 사진에서 예기치 못한 특성들이 가장 잘 나타난다.
‘과거와 현재’라는 부제는 대구사진비엔날레를 구성하는 특별전으로서 과거의 사진과 현대 사진작가의 작품을 비교하려는 기획 의도를 말해 준다. 그리하여 과거 사진을 특징짓는 애매하고 모호하며 불가사의하다는 특성들이 현대 작품의 시적, 미학적 성격을 구성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자 한다. 특별전의 목적도 주제전 ‘사진의 영원한 힘’과 마찬가지로 사진의 특수성이 새로운 형태로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데 있다. 확대 재현된 옛날 사진들을 현대의 작품들과 나란히 배치해서 시각적으로 비교할 수 있도록 전시 공간을 마련했다.
사진은 많은 사람이 보도록 만들어진 관계형 오브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매우 효과적인 장치가 만들어 내고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이 공동의 이미지가 어떻게 진실한 재현인 동시에 다소 이해하기 힘든 수수께끼가 되는가?
사진 이미지의 양가성은 사진을 보는 사람과는 관련이 없는 세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 1. 사진은 고유의 자율적 작동 방식을 가진 매우 특별한 장치를 이용해 만들어진다. 2. 사진은 사진가라는 개인이 만드는 것으로, 사진가 고유의 심리적 의도가 깃들 수 있다. 3. 사진에 찍힌 피사체는 특히 그것이 사람일 경우, 이미지의 의미 작용에 관여한다. 주목받는 것은 피사체이며, 이 피사체가 관객 ‘각자’에게 해석을 요청한다.
따라서 특별전은 사진의 수수께끼 같은 특성을 만드는 데 작용하는 카메라의 역할, 사진가의 역할, 피사체와 관객의 역할이라는 세 파트로 구성된다. 각 파트는 다시 세 개의 섹션으로 나뉘며, 각 섹션은 이미지의 내용을 관객의 지각과 연관시켜 분석하면서, 사진의 돌발적 성격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사진의 으뜸가는 특성은 빛의 물리학에 해당하는 원리로 작동되는 특별한 장치(렌즈, 감광판)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진이 발명된 이후 변함없는 사실이다. ‘디지털 사진’도 이러한 특성을 바꾸지 못했으며 심지어 더욱 강화되었다. 그런데 사진기(카메라)는 우리 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며, 사진을 바라볼 때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사실 식별 가능한 형태에는 개의치 않고 오직 빛의 분량에만 관심 있는 프로세스의 결과물이다. 사진의 프로세스에 내재하는 존재론적 수수께끼는 인간 감각과 사진기(카메라)의 감광 포착 사이의 줄어들 수 없는 차이에서 온다. 즉 사진이 주는 당혹감은 인간의 시지각과 사진 프로세스 사이의 단절에서 생긴다.
‘흑백’(혹은 무색) 사진은 사진이 첫 번째로 촉발한 당혹감이었고, 결국 인간의 눈과 정신은 여기에 적응했다. 인간과 사진기(카메라)의 차이는 ‘컬러’ 사진에서 더 극심해졌다. 우리 눈에 익숙해진 사진의 ‘컬러’는 각각의 프로세스마다 고유의 색감을 가지는데, 이러한 ‘컬러’는 같은 상황에서 인간 눈이 지각하는 색 감각과 결코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진이 주는 놀라움은 모든 세부 사항과 모든 광원을 피사체와 완벽하게 닮은 모습으로 기록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이는 인간의 재능으로는 이룰 수 없는 성과다. 우리가 가진 시지각에 기대어 정의하는 ‘현실’은 빛의 강도와 대비만을 기록하는 사진 이미지의 형태로 제시될 때 완전히 달라진다. 때로 당혹스러운 결과 앞에서 본래의 ‘현실’을 시각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 된다.
첫 번째 파트의 첫 번째 섹션(섹션 1A. 사물의 상태를 기록하는 카메라)은 카메라와 마주한 것을 단순히 포착한 사진에서 발생하는 예기치 않은 결과에 주목한다. 이때의 카메라 위치는 공간적 배치를 이용해 놀라움이나 의문을 유발하도록 의도한 것이다. 그리고 순간 포착 사진, 움직임의 흐릿한 효과, 정밀도 등 빛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특별한 형태들을 다룬다. 이러한 형태들은 사실적이고 과학적인 형상으로 인식되지만, 우리 눈으로는 그렇게 지각되지 않는다. (섹션 1B. 돌발적 형태를 드러내는 카메라) 결국 카메라는 자체적인 지각 세계를 만들어 내며, 이것을 ‘카메라가 지각하고 기록한 것’으로 관객 앞에 내어놓는다. 이렇게 사진은 자신의 기준으로 창조한 낯선 세계로 보는 이를 이끈다. (섹션 1C. 자신의 지각 세계를 드러내는 카메라)
전문 사진가든 아마추어 사진가든, 사진 작업을 행하는 사진가는 사진 제작 과정에서 꼭 필요한 존재다. 카메라는 자율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이 기능을 작동시키는 건 사진가다. 사진가는 카메라를 선택하고 카메라 위치를 결정하며 기술적으로 조정하거나 피사체의 구도와 셔터를 누르는 순간을 결정한다. 최상의 ‘시점’을 찾고 사진 찍을 장면을 수정하거나 아예 촬영할 ‘목적’으로 장면을 창조하며 조명 사용 여부를 판단하거나 조명을 변경할지 결정하는 것도 사진가다. 사진가는 본질적으로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놀라움은 세계를 보는 우리의 방식과 맞지 않는 사진가의 여러 선택으로부터 만들어진다. 사실 사진가는 자신만의 동기가 있고 자신의 사진 세계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 세계는 카메라가 할 수 있는 것과 그가 창조하고 싶은 것 사이의 타협점이다. 관객은 대개 이러한 의도를 알지 못한다. 그래도 사진의 의미나 이유가 무엇인지 단순히 현실을 보여 주는 사진인지 미학적 창작물인지 스스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관객은 자신이 사진가의 ‘눈을 통해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돌발성을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사진가의 지형적 선택에서 나온다. 위치 잡기, 피사체와의 공간적 관계, 카메라 조작이 이에 해당한다. (섹션 2A. 사진가의 입장) 사진가가 사진의 특성을 잘 알고 빛의 효과를 잘 이용한다면 이를 통해 경이로운 요소들을 만들어 낸다는 미학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섹션 2B. 사진가의 미학적 의도) 그리고 사진가는 사진 밖에 있지만, 수많은 개입과 결정을 통해 ‘사진 속’에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감춰진 사진가의 존재는 피사체의 행동이나 시선에 의해 겉으로 드러난다. (섹션 2C. 사진가의 역설적 존재)
우리가 흔히 ‘피사체’라고 부르는 것은 사진 이미지에서 관객이 보거나 본다고 믿는 것, 또는 촬영되었다고 관객이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요컨대 피사체란 카메라 앞에 있는 것으로, 사진 행위가 이루어지는 동안 사진가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으며, 관객이 ‘해석’해야 할 특정 형태로 나타난다. 피사체가 돌발적이라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해석의 어려움에서 기인할 것이다. 때로 피사체는 이미지에 첨부된 설명으로 의미가 명확해지기도 한다. 사진가는 이런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진을 보는 시공간이 사진 속 본래의 순간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거나 사진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을 때는 엉뚱하고 모순적인 해석이 자리를 잡는다.
돌발성은 사진가가 취하는 결정에서 나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사진가는 일시적 의미를 부여하는 사물이나 사람들의 조합을 직관적으로 탐지하거나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우연한 상황을 순간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 (섹션 3A. 상호 관계를 강화하는 프레임) 피사체가 찍는 순간의 상황 속에 들어와 있거나 낯선 것일 때, 혹은 사진으로 찍히는 바람에 수수께끼가 되는 경우 피사체 자체는 돌발적인 것이 된다. (섹션 3B. 스스로를 보여 주는 피사체) 마지막으로, 사진은 이해하기 힘들고 해석하기 어려운 매혹적인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사진을 미완성인 서사의 한순간으로 인식하고 그 맥락과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섹션 3C.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마음)
사진 기술은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사진만의 현실이나 시간의 형태를 반복해서 보여 줌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우리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사진은 우리의 감각으로 포착할 수 없어서 의구심을 품게 되는 진실이 있는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숙하게 느껴지는 미지의 것을 대면하게 해 준다. 우리는 사진에서 각 개인의 마음에 와닿고,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장소를 만난다. 우리는 사진에서 불안한 매력을 감지한다. 사진의 돌발성은 긴장감과 실패한 질문, 우리의 눈과 마음이 제기하는 질문에 대한 무응답에서 나온다.
예술총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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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바올리’는 계단식 우물이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수면에 이른다. 이곳은 평소 우물로 사용하기도 하고 종교적 용도로도 쓰이는데, 사원과 연결된 경우도 있다. 이렇게 바올리는 의식의 공간이자 만남과 사교의 장소다. 피라미드를 뒤집어 놓은 듯한 디자인으로 인해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어두워지며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기묘한 건축물이다. 하지만 우물은 종종 메말라 있다. 플로리안 드 라쎄는 “이 우물들을 원래의 맥락에서 분리해 신비로운 오브제로 만들고 거기에 웅장미를 부여하고자 했다.”라고 말한다. 작가는 프레이밍과 어슴푸레한 조명, 기하학적 형태의 배치를 통해 이 작품을 기이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한다.
이 작품은 우리 몸의 생소한 형태들을,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흐릿한 흔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형태들을 ‘드러낸다.’ 이 연작에서 아나 디 & 누라 케이는 움직이는 여성의 몸으로부터 아주 개성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이 몸은 알아볼 수 있는 실재인 동시에 투명한 베일로 축소되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피사체를 자연의 상태 그대로 촬영하고 움직임 속에서 피사체의 고유함을 포착하여 …… 물리적 현실의 모든 입자가 어떻게 사진의 마술을 통해 새로운 형태로 바뀌는지를 보여 준다.” 작가들은 “의식은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고, 변화는 움직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라는 올더스 헉슬리의 말에서 영감을 받았다. (<보는 기술The Art of Seeing>, 1942)
테리 와이펜박은 일상적인 자연에 관심과 열정을 갖고 있다. 덤불이나 작은 나무, 정원의 식물 같은 보통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자연이다. 하지만 작가는 사진 장치가 유발하는 변형과 변화를 염두에 두면서, 사진의 눈(카메라의 눈)으로 이것들을 관찰한다. 작가가 활용한 프레이밍과 포커스, ‘블러(흐릿한 효과)’ 기술의 결과로 완전한 해석이 불가능한 초자연적 세계가 나타난다. 우리는 마치 열쇠 구멍이나 작은 틈새 안을 들여다보듯 기이한 형태와 다채로운 색상의 식물들이 안개처럼 퍼져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곤충의 눈으로 바라본 듯 확대된 세계, 사진의 표면에 흡수되듯 완벽하게 응축된 세밀한 야생의 세계가 펼쳐진다.
작가이자 사진가인 윌 마츠다의 이 작품은 덧없는 아름다움의 순간, 기억이 보존하고자 하는 것과 사진이 영속화하는 것의 예기치 못한 결합이다. 윌 마츠다는 일정한 시점과 앵글을 활용해 이 결합의 순간을 촬영하면서 생명을 불어넣고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의미를 이미지에 부여한다. 관객도 자리를 고르고 상상의 공간에 자신을 투영해 사진가가 느낀 감각을 경험하고 사진가의 의도를 이해하려 한다. 거울을 들고 있는 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사진가가 손거울에서 보여 주려는 것은 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프랑스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시구가 떠오른다. “내게는 무엇이든 더 아름답게 보여 주는 순수한 거울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의 눈, 나의 커다란 눈이다.” (「아름다움La Beauté」, 1857)
사진가이자 그래픽 아티스트이며 영화감독과 촬영 감독으로 활동하는 미키야 타키모토는 데사우Dessou에 있는 바우하우스 디자인 학교(1925~1926년, 재건축 및 리모델링)의 건축물에 매료되었다. 2005년에는 이에 대한 책도 펴냈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작가의 또 다른 영감과 ‘향수’의 원천이었다. 그는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프랑스의 라투레트 수도원Couvent de la Tourette도 사진에 담았다. 곡선과 원추의 미학, 르코르뷔지에 특유의 표면이 생생한 빛으로 뒤덮인 ‘빛 우물들’은 이 모더니스트 건축가에 대한 헌사의 표시다. 프레임이 강조하는 것은 곡선의 반향과 직각 형태로 절제된 균형을 추구하는 사진의 그래픽적 구성, 그리고 마치 혼돈 속에서 표류하고 있던 것처럼 그늘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조화로운 색상이다.
인도 콜카타에 거주하는 포토저널리스트 데비프라사드 무커지는 어려운 사회 현실을 사진에 담는다. 그는 특히 (일곱 살의 샤루크Shahrukh 같은) 거리의 아이들이나 기차역을 헤매는 아이들, 그리고 청각장애인에게 관심을 가진다. 작가는 이들과 만나 함께 놀고 같이 위험을 감수하고 여럿이 같이 다니며 우정을 나누면서 이들의 극적인 삶의 굴곡을 기꺼이 따라간다. 사진들에서는 기이한 프레임과 상황 구도가 사진가를 향한 시선에서 드러나는 친밀감과 결합하고 있다. 이 시선은 사진가가 포착하려는 본질적이고 의미심장한 피사체다. 이러한 공감의 관계 속에서는 서로에게 서로가 필요하다. 사진가는 카메라를 작동하면서 삶을 위한 아이들의 투쟁과 기대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와 동시에 카메라와 마주한 아이들의 시선은 사진으로 생기는 상호 의존적 관계에 대한 신뢰와 불안감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다.
휘유 로의 작품은 ‘상호 관계’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 준다. 작가는 “쌍둥이 엄마의 정체성과 엄마와 자녀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고 작품을 설명한다. 쌍둥이의 어린 시절을 수많은 사진에 담아 온 작가는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던 무렵, “카메라 렌즈를 자신에게로” 돌렸다. 엄마이자 사진가로서 상황을 구성하고 어떤 감정을 전달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녀 자신이다. 그녀는 목격자로서의 관객을 배제한 채 항상 눈을 감은 채로 사진 전경에 서서 자신이 자녀들을 지켜보고 걱정하는 엄마의 입장임을 강조한다. 아이들이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일에 자연스레 몰두하는 동안 엄마인 작가는 그 자리에 존재하는 동시에 부재한다. “이 작업에서 나는 독립과 친밀감을 동시에 원하는 엄마의 역설을 표현하고자 했다.”
중국 청두 출신의 펑 리는 개인적인 경험이나 만남, 혹은 함께하는 친구들과의 분주한 활동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작가는 마치 사진으로 메모하며 일기를 쓰듯이 자기 모습을 반복해서 찍고, 누구나 볼 수 있는 별나고 재미있는 상황을 날마다 촬영하며, 촬영한 사진 중에서 박장대소할 만큼 웃긴 이미지들을 찾아내거나 만들어서 많은 사람과 공유한다. 그의 작품에서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파격적인 상상력과 누구에게나 선뜻 알려주는 기발한 아이디어, 그리고 엉뚱한 짓이나 소소한 미친 짓을 내보이는 사진을 통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낮과 밤이 만나는” 백야의 세상에서 정오와 자정은 한 몸이다.
1980년대 초, 구본창이 유럽에서 찍은 사진들은 (“렌즈를 통해 세상을 만나면서”) 서구의 문화를 발견하고 낯선 도시의 삶을 경험하는 방법이었다. 또한 자신의 정체성과 관점을 간접적으로 발견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평범한 구도에 즉각 반응하여 순식간에 시각적으로 기록한 이 사진들은 우리를 “각자의 우주 안에 있는 지각知覺 센터”(알라스데어 포스터Alasdair Foster)로 데려간다. 뜻밖에 만나게 된 이 형상들은 그 순간의 사진가에게 ‘영감을 주었기에’ 사진가는 그것들을 거리에서 건져 올려 시선으로 낚아채고 기념품처럼 벽에 걸어 놓았다. 이제 이 사진들은 관객인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이미지 너머에 사람이 살고 있으며 이들도 그곳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이미지 하나하나의 이전과 이후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리며 그들의 삶에 관한 짧은 이야기들을 상상해보자. 어쩌면 우리도 사진가가 홀로 느꼈던 그 순간의 감각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지 카메라 작동, 즉 이미지를 포착하는 단순하고 직접적인 행위일 뿐이다. 이 이미지는 카메라 맞은편에 놓인 ‘사물의 상태’를 보여 준다. 사진은 기술적 과정을 거쳐 원근감, 입체감, 깊이감 등을 사각 프레임 안에 옮겨 놓는데, 여기서 뜻밖의 효과가 나온다. 이렇게 탄생한 이미지는 정확성과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눈이 같은 장소에서 지각하는 것과 공통점이 거의 없다. 사진의 프레임에 잡힌 공간은 배경과 맥락에서 분리된 독자적 공간이 된다. 사진가가 선택한 장소나 건물에는 사진을 통해 기념하고, 범위를 정하고, 형태를 부여한 결과로 생긴 수수께끼 같은 의미, ‘장소의 혼’이 깃든다. 놀라움은 공간의 구성과 장소의 낯섦에서 비롯된다.
제한된 짧은 시간 동안 광원을 기록하는 사진 장치의 작동 방식은 사진의 고유한 특징이다. 그 결과 사진은 너무 순간적이거나 너무 어둡거나 혹은 빠르게 움직이는 상태라 인간의 눈으로는 지각할 수 없는 형태를 이미지에 담을 수 있다. 순간 포착 사진이 움직이는 물체를 정지 상태로 보여 줄 때 나타나는 ‘흐릿한 효과’로 인해 대상의 윤곽은 사라진다. 사진만이 그 고유한 프로세스 덕분에 이런 기이한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어느새 우리 눈에 익숙해진 이 이미지들은 세상의 현상들에 대한 유효한 재현물이 되어 우리의 시각적 상상을 보완해 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진 이미지가 보여 주는 것은 인간의 일반적 시지각 능력과는 거리가 멀다. 사진은 우리가 촬영하는 자리에 있었다면 보았을 자연스러운 공간이 아닌, 사진의 기준이 엄격하게 적용된 ‘그래픽’ 결과를 제시한다. 이것은 카메라에 의해 변형된 이미지다. 사진기의 고유한 특성은 ‘다른’ 현실을 드러내고, 물리적 세계의 미적, 시적 특징들은 우리에게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관객인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낯익은 세상을 찾아보려 한다. 이와 동시에 예기치 못한 형태들을 보여 주면서 우리의 시지각이 갖는 실제적 효과를 의심하게 하는 이 평행 세계를 호기심 가득 받아들인다.
사진가는 그가 보는 것에 반응하고 결정을 내린다. 그는 자신이 부각하기로 마음먹은 것을 가장 잘 보여 주기 위해 공간 속에 자리를 잡는다. 사진적 효과와 원근적 효과, 그리고 심미적 감명을 최적화하기 위해 물리적, 정신적으로 자리를 잡는 것이다. 사진가는 이러한 시각적이고 정신적인 ‘시점’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사진가는 자신만의 고유하고 특별한 의미를 이미지에 담는다. 또한 사진가는 자기 작품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 목적으로, 이 작품에서 공감, 우애, 유머, 투쟁, 애정 등의 가치를 발견할 관객들을 생각하며 작업한다. 무엇보다도 사진가는 우리가 보지는 못했어도 자신이 사진을 통해 감동의 기회로 포착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를 원한다. 순간적으로 포착된 시각적인 흥분의 순간이다.
사진은 이미지의 세계에서 표준이 되는 고유의 미학적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사진의 역량에 따라 사진가는 자신의 의도, 통찰력, 그리고 뜻밖의 효과를 주려는 욕구를 발전시킨다. 그는 프레임, 조명, 피사체의 배치, 기술적 능력을 이용해 평범한 주제를 놀라운 이미지로 탈바꿈시킨다. 피사체와의 거리, 앵글, 최종적인 리프레이밍reframing를 통해 이미지는 불현듯 신비롭고 매력적인 ‘작품’이 된다. 사진은 사물, 물질, 음영을 고양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진가는 이런 프로세스를 통해 이미지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구성을 꾀한다.
사진가는 사진을 ‘만드는’ 모든 결정의 주인이다. 하지만 사진가는 바깥쪽에 자리하면서, 그리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복잡한 장치를 가동하면서 이미지를 만든다. 사진은 사진가의 존재가 남긴 흔적들을 간접적으로 담고 있으며 관객은 이 존재를 느끼고 염두에 둔다. 피사체가 사진가나 카메라를 향한 제스처를 취할 때 사진가의 존재는 더 확실해진다. 피사체가 시선을 통해 사진가의 행위를 가리키고 받아들이는 순간, 나중에 사진을 보게 될 모든 사람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다. 원래부터 피사체의 시선은 그곳에는 없지만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을 향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사진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상대방의 시선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고 우리의 자의식적 존재를 이해하게 만드는 감정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
사진 이미지가 재현하는 제한된 영역은 카메라 앞에 있던 공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영역이 사진가가 피사체를 구성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다. 관객은 제한된 공간 속에서 사진가가 선택한 요소들이 무엇인지, 이것들을 어떻게 연결했는지 이해해야 한다. 사진은 우리의 시선이 촬영의 이유와 이해의 실마리를 찾아 탐험하는 복합적인 총체다. 그런데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한 것은 피사체인가? 사진가의 취향에 따른 연출인가? 아니면 사진의 예상치 못한 효과를 해석하는 데 주저하는 것은 관객인가?
이 경우, 피사체는 독특한 모습에 예상치 못했던 특징을 갖추고 있어서 단박에 눈에 띈다. 당황스럽고 놀라운 피사체의 모습이 사진가의 눈에 들어왔거나 사진가가 환상적이고 기묘한 장면을 연출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 모습을 기록하고 인증한 것은 사진가다. 상상력이 풍부한 피사체는 더욱 독창적인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상투적인 촬영 포즈에서 벗어난다. 사진가도 좀 더 독특한 이미지를 제공하고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혹은 피사체의 창의적인 개성이 발휘될 수 있도록 그의 시도에 동참한다. 이로써 관객은 세계관이 확장되고 평행 우주와 연결되는 기이한 제안 앞에 마주 서게 된다.
사진은 영원히 불변하는 이미지다. 조각으로 잘려 고립된 장소와 거대하고 변화무쌍한 맥락 중에서 어느 특정 순간만 보여 줄 뿐이다. 그 어떤 확실성도 보장하지 않고, 사실에 기반한 진실만을 담아 단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흩어진 단서만을 재현한다. 사진을 찍을 당시, 사진가가 실제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촬영했는지 모르는 관객은 이미지를 통해 반쯤만 드러난 ‘이야기’의 전후 관계와 변주들 그리고 이어질 결말을 찾고자 한다. 관객은 가상의 이야기에 감정이입을 한 채 사진 이미지, 그리고 사진 속 인물이나 사물에 자신을 투사한다. 이미지가 미묘한 반향과 감정을 일으키기에 그는 거기에 관여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러고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에 마음속으로 참여한다.